
In the night when I feel hollow See your shadow
공허한 밤마다, 네 그림자를 봐

팬님 리퀘스트
소섀젠 다크비기닝과 섀젠 게임 오프닝 사이의 일입니다.
"테리오스, 지구는 이렇게, 스스로 빙글빙글 돌거든. 그럼 햇빛이 비치는 곳이 있고 반대쪽은 그림자가 진단 말이야? 그때 지구의 하늘은 빛이 사라져서 밤이라고 일컫거든. 네 색깔은 그 밤 색깔 같아."
"밤?"
"응. 그때는 이 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달이 떠. 그러고 보니 정말 밤하늘이네! 테리오스는."
흉터를 쓸어주며 말하는 소녀는 살풋 웃었다.
마치 자신의 흉터를 걱정하지 말라는 듯 쓸어주는 손길에 많은 위안을 얻었었다.
테리오스는 무표정으로 소녀를 일관했지만 소녀는 익숙하단 듯 자신에게 말을 했었고 저 말을 하며 자신이 아끼는 오르골을 보여줬다. 지구본 모양의 오르골은 소녀가 축을 돌리자 정말 저 아래에 있는 지구처럼 천천히 자전을 하며 느리게 이어지는 멜로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소녀가 자주 흥얼거리던 음이었다. 그 노래가 뭐였더라. 기억나는 가사만을 떠듬떠듬 읊으며 소녀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함께 하곤 했었다. ...작은 별,.... 아름답게.......
그랬던 소녀가 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눈 앞에서 숨이 멎었었다. 두 개의 총알구멍은 안 그래도 여렸던 소녀를 더욱 애닯게 만들었었다. 생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막으려고 하다 손을 거뒀다.
왜 거뒀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 멍하니 그가 지구로 떨어진 탈출 머신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마리아는 섀도우를 지켰다. 내가 아닌, 그를. '나와 비슷한 친구'를.
소녀는 그에게 무어라 말한 것 같았지만 들을 수 없었다. 무장을 한 인간들이 몰려왔다. 접근하지 못하게 그들을 막아냈다. 나는 끝까지 널 지키기 위해 너를 죽이려는 인간들과 싸웠는데. 내 한쪽 눈까지 희생하면서 너를 구해내려 했는데. 네게 구멍을 뚫은 너를 위한 복수를 하고 있었는데. 네게 총을 겨눈 인간들의 팔을 꺾고, 너를 노려보는 눈을 뜯어버리고 네게 험한 말을 하는 혀를 뽑아버렸는데. 그것에 겁을 먹어 도망치려는 다리를 박살 냈는데. 그런데도 너는. 너는.
흉만 남았던 왼쪽 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둑해진 시야를 무시하며 좁은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검붉은 웅덩이가 제 부츠를 적시고 있었다. 쭈그려 앉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니, 붉었던 눈동자는 이미 하얗게 세어있었다. 아마 이전 프로페서가 보여줬던 '타박상'의 증세이리라. 비어버린 눈동자 주변에는 무엇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차오르다, 울컥 넘쳐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것을 보니 피는 아닌 듯 했다.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우주를 바라봤다. 철과 기름내가 제 코 끝을 빙글 돌았다. 눈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눈가는 따가웠다. 코 안쪽이 매웠다. 바닥엔 여전히 소녀의 피가 흐르며 굳어가고 있었고 발께를 뭉근히 적셨다. 무언가 울렁이며 속에서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것이 울음이란 것도, 감정이란 것도, 혹은 질투라는 것도 테리오스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알았지만 외면했다. 그 모든 것을 소녀가 '자신과 비슷한 친구' 에게 알려주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것을 몰래 들었다는 것에 스스로 비참해져 일부러 알고 있는 지식을 닫았다. 스멀스멀, 뱀처럼 기어오르는 불쾌한 타르 같은 것들을 무시하며 한 발짝, 두 발짝, 차갑게 식어간 그녀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방을 빠져나와 멍하니 걸었다.
스페이스 아크의 복도는 텅 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는 존재는 자신 밖에 없었다. 숱한 시체들을 골목 삼아 걷는 발걸음은 차갑게 울렸고, 우주의 여빛이 드리워진 벽이며 바닥은 피로 얼룩덜룩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테리오스는 그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프로페서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말했던 복수. 혹시나 있을 수 있는 플랜에 대한, 지구인을 향한 복수. 혹여 섀도우가 실패한다면 네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유언.
인간들은 자신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프로페서에게 실험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제 손녀의 목숨을 위해 인간에게 허락치 않은, 생을 창조하지 않으려 했던 평화주의자도 자신이 마음바쳐 사랑했던 소녀에겐 어쩔수 없었나보다. 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그들에게 놀아났다. 단지 저 푸른 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이유만으로. 미친놈들.
제 발 아래에는 투명한 유리와 함께 햇빛을 받아 빛우리가 울리는 지구가 있었다. 그 위엔 스페이스 아크가 있었다. 그 위엔 저가 밟아온 핏자국이 선명히 남았고, 그 위엔 저가 서있었다. 테리오스는 제 목에 둘러진 빨간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이곳에도 피가 묻어 일부는 고동색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거울을 통해 보면 꼴이 몹시 기괴할게 분명했다. 제 가슴께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박자와 리듬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자신을 울리는 북소리가 세차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고동은 프로페서의 유언 따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저 지구에 혼자 도망쳐버린 그를, 섀도우 더 헤지혹까지 인간과 함께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어떤 것이 위벽과 목을 긁으면서 올라온다. 애써 삼키며 다시 그림자 진 얼굴로 별을 바라본다. 산산조각이 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을 향한 복수. 그 굳건한 신념이 그의 속을 파내고 자리 잡았다.
"저 별을 반으로 쪼개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죽여도, 난 성에 차지 않을 거다. 마리아."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테리오스는 언제 잠들었을지 모를 자신의 몸을 주무르며 눈을 힘겹게 떴다. 스페이스 아크가 흔들렸기 때문이리라. 은은하게 가동되고 있는 스페이스 아크는 여전히 우주 위에서 유영중이었다. 물론, 제 주변에 부옇게 남은 먼지들이 세월의 체감을 말해준다는 듯 내려앉았지만 개의치 않았다.먹지 않아도 생을 유지할 수 있는 그는 소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잠들어버렸다. 자신과 비슷하면서 다른 모습. 넌 섀도우의 프로토타입이란다. 테리오스, 너와 비슷한 친구래. 물안개처럼 퍼지는 목소리들을 종합하면 자신은 '그'를 만들기 위한 실험체에 불과했다. 테리오스는 덜 열린 시야를 억지로 비집고 열어선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이곳에 왔다. 혹 접때 보았던 블랙둠이란 자들일까, 아니면 뒤늦게서야 내 존재를 알게 된 다른 인간들이 나를 찾으러 온 것일까. 극비리에 진행됐던 프로토타입의 존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프로페서와 약간의 과학자들, 그리고 마리아 정도겠지. 테리오스는 마리아가 자신의 본체인 양 소녀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언젠가 소녀가 들려준 피터팬이라는 동화책에서는 웬디의 고양이가 그의 그림자를 잡아 채 발바닥에서 떼어냈다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피터팬이 마리아고 내가 그 그림자일지도 몰라. 멍하니 소녀가 읊어주는 동화를 들으며 뭉글, 그 생각이 떠올랐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소녀의 발 아래에 굳건히 박제당한 자신을 생각하는 사이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리오스,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다, 마리아.
그래. 어쩌면 마리아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소녀를 살려낸 것일까? 살려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숨을 멎었다고 외면하며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때 테리오스는 멈춰버린 마리아를 어쩌면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꿈속에서 여러 번 되뇌었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자신이 거짓말로 덧대면 그럴듯한 사실처럼 탈바꿈한다. 테리오스는 다시 소녀가 죽어있었던 그 탈출구로 몸을 돌렸다. 제 옆을 지나치는 수많은 방들에는 지구가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것처럼 은은하게 여빛을 발했다. 자신의 흉터와 더 이상 열리지 않는 왼쪽 눈동자 위로 드리워지는 여빛, 그리고 그림자, 그리고 지구, 그리고 마리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너를 만나면 무어라 말할까. 넌 나를 반갑게 맞을 수 있을까? 아니면 원망스럽게 쳐다볼까?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원망 섞인 소리로 내게 소리치면 자라 버린 소녀를 안아줄 계획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소녀가 가르쳐준 감정의 표현 방법 중 하나였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왠지 소녀를 안으면 자신이 잠들어버린 시간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럼 나도 네게 들었던 것들을 네게 해줄 수 있어.
비틀대며 걷던 그의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바닥에는 깨진 행성들처럼 산산조각 난 것들이 제 신발에 밟혔다. 리듬과 박자가 빨라지며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세월로 인해 낡아진 신발은 여전히 건재했다. 자신도 건재했다. 그것은, 살아있음을 뜻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들어온 것처럼 짙은 그림자와 빛이 뿜어져 벽에 선명히 새겨졌다. 테리오스는 직감했다. 저것은 마리아다. 나를 만나러 온 거야, 그리고 그에게 이야기했던 지구라는 곳에 함께 갈지도 모르고, 어쩌면 많은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겠다.
"마리아!"
우습게도 자신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반가움, 이라는 감정이었댔다. 하지만 그곳에는 저 혼자 이곳에서 탈출한 배신자가 있었다.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도 그를 구해주지 않고 홀로 지구로 떨어져 버린 나약한 놈. 테리오스는 자신과 다르면서 닮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섀도우 더 헤지혹."
"...! 너는.“
삽시간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테리오스, 너는 표정 변화가 없어서 문제야. 테리오스, 너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나저나 여기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그나저나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테리오스.... 살아있었군. 어쩌면 마리아도 기뻐할지 모른다. 검은 고슴도치는 마리아가 했었던 말들을 읊으며 자신에게 안부를 전했다. 마치 먼 옛날 이야기를 하듯, 그러니까 마리아가 자신에게 들려줬던 동화처럼 아득하게 말하자 테리오스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너를 만날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테리오스."
섀도우는 짧게 숨을 삼키더니 그의 이름을 천천히 읊조렸다. 마리아가 살아 있었을 땐 그에게 테리오스는 그저 카오스 컨트롤을 견뎌낼 수 있는, 이를테면 지구에서 말하는 '샌드백'에 불과했다.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 강해졌는지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 그는 묵묵히 자신의 힘을 받아내는가 하면 대응을 하고선 차가운 붉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었다. 연구원들이 그는 위험한 존재이며 심기를 건드렸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므로 가까이 하지말라는 경고에, 착했던 섀도우는 그 말을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와는 인사조차도 나눌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마리아에게 그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마리아가 아팠기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50년이 지났으니."
뒷 말을 이은 섀도우의 소리에 테리오스는 움찔했다. 50년이나 지났다고? 그럼 소녀도 언젠가 보았던 노년의 모습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마리아는 죽었으니까."
머리가 멍해졌다. 명제가 된 사실은 각인이 되어 제 머릿속에 깊이 틀여박혔다. 그래. 그 날, 마리아는 죽은거다. 내가 살릴 수 있었을까? 비록 그 작은 몸에서 총알을 빼낸다고 해도, 소녀가 가졌던 지병을 자신이 고쳐줄 수도 없었을 것이리라. 숨을 힘겹게 내쉬며 자신을 향해 돌아보던 소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닮은 저 고슴도치에게 향하다는걸 알았지만 구태여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래서 소녀의 죽음이 진실이 되어 제 앞에 놓여졌을 때, 테리오스는 비틀게 웃으며 그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50년이 지나도, 프로페서의 명령은 존재해."
"명령?"
"그래. 알고 있지 않았었나? 저 지구를 반으로 갈라버리라는 프로페서의 명령. 50년이 지났고 네 녀석도 저 별의 특성을 알아채고도 남은 상황일테니 그 명령쯤은 식은 죽 먹기겠군."
".......복수는 무의미하단걸 알게 됐어."
"뭐?"
되물음에 섀도우는 잔잔하게 말했다. 별에 비춰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여빛이 되었고, 그 빛은 푸르게 둘을 비추고 있다. 어둑한 스페이스 아크를 비추는 단 하나의 빛. 그건 지구였고, 둘을 비추는 빛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래. 둘은 살아있었다. 섀도우는 푸른 별을 볼 때마다 그 소녀가 생각났던 것인지, 조금은 슬퍼하는 듯한 얼굴로 푸른 별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저 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난 거니까."
그 말에 테리오스는 미간에 주름이 잔뜩 져지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귀에는 분명히 그의 말이 들어왔지만, 뇌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아는 글인데도. 말인데도. 저 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저 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이 곳을 소리 소문 없이 없애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작은 소녀를, 죽였던 사람들이라고. 목 안 쪽부터 무언가 터져나오듯, 테리오스는 그에게 일갈했다.
"행복? 기회? 그들이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놈은?"
"그래. 그것이 마리아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우리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작게 숨을 내쉬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섀도우의 가슴팍에 숨이 일자 작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물론 나 또한 그 복수에 미쳐있었다. 저 별에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었지. 하지만,..... 그렇게 휘둘러봐야, 돌아오는 건 없었어. 그러니 지키기로 결심한거다. 저 별은 마리아가 사랑하는 별이었으니."
사랑. 자신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마리아에게 갈구했지만 받지 못했던 것. 그리고 눈 앞에서 마리아가 섀도우에게 건네줬던 것. 그 때문에 섀도우는 소름 끼치도록 마리아와 닮아있었다. 물론, 마리아가 가진 완전한 다정함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고 몸을 돌려 대화를 하는 제스처, 마리아, 라고 읊조릴 때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지독하게도 소녀와 닮았다. 과거의 소녀가 마치 전령처럼 미래에 존재하는 자신에게 똑같이 되새겨준다는 듯, 테리오스가 기억 너머에 묻어두었던 일상의 말들을 섀도우가 짧게 툭, 던지는 그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몸에 가득 새겨졌다. 그는 주먹을 꾹 쥐었고, 섀도우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굉음이 퍼지며 둘은 육탄전을 벌였다. 도망친 주제에 네 놈의 입에서 마리아의 이름을, 감히, 네가....! 주먹을 꾹 쥐고 내리치자 섀도우는 작게 신음하며 고개가 돌아간다. 다음 주먹은 제 손으로 막은 뒤 그의 공격에 마치 짜인 대본을 읊는 듯 대응했다. 무참히 막히는 공격에 미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섀도우는 전투 실력이 상당했다. 스페이스 아크에 있던 그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발전했고 어딘가 달라져있었다. 나약하지 않았고 자신과는 어떤 것이 달라져 있었다. 테리오스는 문득 제 머릿속에 새겨진 어떤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성장.' 그래, 그건 성장이었다. 자신처럼 시간 속에 갇혀 진실을 외면하고 직시하지 못한채 버려진 우주선에서 유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지구에서 성장했고, 그래서 마리아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해. 그건 자신이 못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저 별의 인간들을 지켜달라고 한거지? 테리오스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소녀의 말이 울렸다. 부디 저 지구의 사람들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줘. 그 말을 언제 들었더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섀도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리아가 그런 말을 했었지. 다 안다는 듯 대답하는 그를 바라보니 더욱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잔해들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이를 으득인다. 터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묵직한 주먹질을 해대며 벽과 바닥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가벼히 피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그는 자신이 가한 힘의 두배에 달하는 반격을 가한다. 그것을 맞고선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마치,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숱한 공격을 응축시켜 제게 쏘는 듯 했다.
"마리아는 죽었다. 그걸 모르진 않겠지."
".......“
명제는 명확히 사실이 되어 진실이 된다. 그래. 마리아는 살아있지 않았다. 그날 자신의 앞에서 숨을 거둔게 맞았다. 그럼 왜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은거지? 왜 내겐 네 마지막 말을 전해주지 않은거야, 마리아. 난 이제 너를 상상했던 망상 속에서 꿈처럼 헤엄치다 나올 뿐이다. 숨을 쉬고싶으면 겨우 나와 진실을 한 모금 삼키곤 다시 너가 존재하는 망상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아버린다고. 어째서 내게 그렇게 대했던거지,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본건가, 어째서, 섀도우는 너를 닮아 다정해진거냐, 어째서 너는 내게 다정함을 가르쳐주지 않았지? 나는, 내가 존재한 이유는, 내가 네 곁에 있었던 이유는,.... 하지만 테리오스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는 섀도우에게 일갈하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우리는 복수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프로페서의 뜻을 잊었나?"
섀도우는 테리오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잃어버린 게 뭔지 봐, 복수심에 눈이 멀어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외면하고 있지 않나? 아니면,... 잊은건가?"
테리오스는 그 말을 듣고 멈춰 섰다. 섀도우가 자신의 눈에 비춰주는 것은 마리아의 모습이었다. 그는 섀도우를 볼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더욱 생경하게 되살아났다. 스페이스 아크에서의 평화로운 나날들,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마리아의 웃음, 그리고 소녀가 흥얼거렸던 멜로디와 노래 가사가.
"난 마리아가 했던 유언은 들은 적 없다."
"늘 구석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널 보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나? 마리아가 마지막 말을 할때 너는 그 뒤에 있었던 것을 내가 기억하는데. 내가 지구로 떨어지기 직전에 네가 마리아에게 다가가는 것도 기억하다만."
그는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구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마리아가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섀도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테리오스는 소녀의 마지막 유언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 조차도 자신이 아닌 그에게 복수는 소녀를 잃은 슬픔을 인정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런 테리오스에게 섀도우는 마리아가 남긴 잔인한 유산과도 같았다. 담담히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그의 하얗게 세어버린 눈을 아프게 찔렀다. 섀도우를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마리아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것을 인정하자 더욱 깊은 공허함이 그를 감쌌다. 테리오스는 자신의 하얀 눈에 손을 올렸다. 마리아를 잃은 슬픔과 소녀를 버린 죄책감이 그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의 핏빛 눈동자에 마리아의 환한 미소가 담겼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복수는 소녀를 잊으려 한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그는 복수를 통해 마리아를 잊으려 했지만, 복수를 마친 후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녀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따를 용기도 없었다. 행복할 기회를 주라고? 웃기는 소리. 나 조차도 행복하지 않은데. 나는 그 감정을 몰라, 마리아. 그는 그저 마리아가 없는 세상을 홀로 살아갈 뿐이었다. 그의 하얀 눈동자는 영원히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고, 그의 붉은 눈은 복수라는 헛된 길을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영원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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